
안전망에서 안전공간으로
-포스트-2008년의 안전 감각과 진정성의 전환
[국문초록]
이 연구는 2008년 이후 안전 감각과 진정성의 시대정신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분기점을 2008년으로 가정한다. 2008년의 광우병 논란은 근대적 안전망 체제의 몰락을 폭로한 계기였다. 아울러 그것은 ‘CEO 대통령’으로 대변된 신자유주의의 리스크 감수 원리가 봉착한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이후 2014년에 세월호 참사, 2015년에 메르스 사태,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참사가 연이어졌다. 체제로서의 안전망과 개인들의 생존감각으로서의 안전 감각은 이 과정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분열됐다. 안전 감각의 변화는 동시에 진정성의 감각을 변화시켰다. 오늘날 공적 자아의 새로운 표현 형태를 본 연구는 ‘다연결망 원포인트 실천공동체의 추구’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근대 진정성의 도덕적 이상을 대체했다. 본 연구는 2008년 이후의 안전감각과 진정성의 변화를 통해 한국사회가 사회문제의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판단한다.
주제어: 안전망, 안전공간, 리스크 관리, 진정성, 다연결망 원-포인트 실천공동체.
<목차>
1. 들어가며: 포스트-2008년과 안전망의 위기
2. 세월호에서 강남역으로
3. 포스트-2008년의 진정성: 원-포인트 실천공동체와 ‘연결형 자아’
4. 맺으며
1. 들어가며 - 포스트-2008년과 안전망의 위기
본 연구는 한국사회의 안전과 진정성의 시대감각이 2008년 이후 어떤 근본적 전환을 겪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본고의 키워드는 리스크 관리, 안전망, 안전공간, 진정성 등의 개념들이다. 2008년을 시대사적 분기점으로 만드는 것은 ‘안전망’(security)과 ‘안전’ (safety) 감각의 근본적 균열이다. 본고는 안전망과 안전의 개념을 엄격히 구별하기로 한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전자가 현대사회의 체제재생산 메커니즘과 연관된다면, 후자는 전자의 붕괴 국면에서 나타난 시민사회 혹은 개인들의 공동체적 방어감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를 촉발한 것은 ‘먹거리 안전’이라는 새로운 사회이슈였다. 현대사회에서 안전이라는 것은 수세기 간 지속된 사회문제의 화두였다. 예컨대,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은 청계피복 시장에서의 참혹한 노동환경이 그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몸을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장시간 노동의 비인간적 환경, 손가락을 잘라내는 공장기계의 흉물스러움은 산업화 속에 안전이 직면한 위험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60년대 논픽션 르포문학이 이미 도시 이면의 가난한 삶을 묘사했다(천정환 2011, 235). 우리가 근대화라고 부르던 시대의 안전 문제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성장국면 이면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90년대에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붕괴했을 때, 사람들은 ‘급속한 근대화 추구의 폐해’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2008년 이후의 안전 문제는 이 근대화의 문제와는 결을 달리한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1970~1980년대 지식인들의 자의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대 지식인들이 사회비판의 역사적 소명을 인식하는 데 사용했던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주체화의 실패’라는 것이었다(이남희 2015, 78). 지식인들은 식민지 해방 후에도 미군정의 지배가 이어지자 민족의 해방을 스스로 실현하지 못했다는 자각을 하게 됐고, 이것을 ‘주체화의 실패’라고 규정했다. 하나의 권력에서 다른 하나의 권력으로 체제가 이양되었고, 주체는 자주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새로운 권력에게 거세되었다. ‘주체화의 실패’라는 모티프는 당대 문헌들에서 거세의 은유와 같은 것이었고, 많은 경우 장애의 비유로 연결되곤 했다. “사팔뜨기”, “상처로 뒤덮인 유린당한 몸” 등이 한국사회 주체성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활용되었다(같은 책, 80).
유사한 모티프가 문학 영역에서도 반복적으로 출현했다. 70년대에 이 장애의 모티프를 활용한 대표적 작품이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80년대에는 박노해가 약간의 변주를 담아 ‘잘린 손가락’에 대해 말했다. 아래는 그의 시「손무덤」(1984)의 일부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 중략 …)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주체화에 실패한 몸이 유린당한 몸이었듯, 시민권을 얻지 못한 노동자의 몸은 손가락이 잘리거나 성장이 멈춘 장애의 몸이었다. 70~80년대의 안전은 기본적으로 거세, 훼손의 모티프와 긴밀히 연결됐다. 누군가는 죽거나 다쳤지만, 그 훼손은 저항을 통해 회복되고, 새로운 주체의 이름하에 통합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됐다. 근대화의 과정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시민사회의 교육적 저변 확대를 동반했고, 이 과정은 안전의 훼손 속에서도 계층이동과 미래의 진보를 도모할 여러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위험은 개별의 몸, 혹은 공동체에 일어나는 훼손이었지만, 동시에 저항을 불러오는 사회변혁과 진보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반면, 2008년의 ‘먹거리 안전’ 이슈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수반했다. 그것은 몸 일부에 일어난 훼손이기보다 총체적 절멸에 가까웠다. 먹거리는 특정 공장이나 지역에 한정되어 배포되지 않으며, 시민들의 일상 전반으로 흘러들어가 위험을 확산시킨다. 위험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어느 만큼의 빈도를 갖고 출현하는지도 불확실했다. 공장에는 공장 나름의 산업재해 요소와 범주가 존재한다. 빈민촌에는 빈곤이라는 문제가 시대와 지역별 격차를 두고 일정한 ‘비율’로 존재한다. 현대의 안전망 시스템은 이 범주와 빈도에 대한 확률적 관리를 통해 발전했다. 예컨대, 산업재해율과 빈곤율과 범죄율 등이 존재하고, 노동시간과 건강 간 관계를 연구해 적정의 노동시간 범위를 산출할 수 있다. 교통사고율과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도로를 새롭게 건설할 수도 있다. 그간 먹거리 안전에 있어서도 위생적 차원의 오염과 전염 등이 문제로 인식되었지만, 이는 도시위생 관리와 교육 등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광우병 위험은 그 확산의 범주에서도, 위험측정의 지식 차원에서도 기존 안전망 관리 시스템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현대 통치술의 핵심 개념인 안전망이 확률에 준거한다고 할 때 사고의 근저에 놓인 또 하나의 개념이 바로 ‘리스크’다. 위험(danger)이 보통 인간이 처하게 되는 위협의 사태나 현상을 말한다면, 리스크는 그 사태의 확률적 가능성을 뜻한다. 위험은 인간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에게 닥치는 것에 가깝다(Beck 2009, 296). 반대로 리스크는 인간의 인식작용을 통해 적극적으로 전유되는 지적 개념이다(ibid.). 요컨대, 리스크는 확률적 측정치로 환산된 위험의 가능성을 말한다. 인간 바깥에서 인간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출현하지 않았지만 그 개연성을 인간 인식의 차원에서 포착한 것이 리스크다.
미셸 푸코 이래, 안전망과 리스크 개념은 현대의 통치론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들로 간주되었다. 푸코와 그 계승자들은 안전망 체제의 핵심 원리를 리스크의 분산관리로 이해했고(Ewald 1991, 203; Baker 2007), 그 분산관리의 목적을 리스크의 제거가 아니라 리스크의 균형상태 유지에 있다고 해석했다(Foucault 2011, 24). 로베르 카스텔은 프랑스 사회보험제도 도입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고, 화재, 홍수, 심지어는 질병과 실업과 노화 혹은 죽음으로부터 사람들이 ‘보호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들은 대체로 위험요소들이며,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이 위험들은 이러저러한 순간에 나타날 것이며, 그 사건들의 출현은 계측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적 삶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리스크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다.(Castel 2003, 217)
반대로 광우병은 확률의 계측 범위를 넘어섰다. 광우병 발병 원인에 대한 지적 논쟁이 촛불시위 내내 ‘광우병 괴담’론, MBC PD수첩에 대한 정부 탄압 등의 사회적 논란들과 더불어 격렬히 전개되었다. 광우병이 전염병의 확산성을 갖는지 않는지, 한국인의 유전적 요소가 광우병에 취약한지 아닌지, 30개월 미만 소에 광우병 위험물질이 있는지 없는지 등이 모두 총체적인 해석과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김종영 2011).
안전망 체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의 국민국가적 기반에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사회보험 정책을 고안할 때 지적 토대가 된 것은 사회적 ‘연대’의 상상이었다. 에밀 뒤르켐, 레옹 부르주아 등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시민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보험 등의 매개장치를 통해 유사-사회계약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田中拓道 2014, 238~239). 구성원들 서로가 보험의 비용을 분담하고, 의무가입의 형태를 취할 때 보편적 시민권과 안전망이 구축될 수 있다. ‘사회’라는 것은 익명의 개인들이 상호연대책임을 느끼며 형성하는 상상적 공동체 관계로 이해되었다. 19세기 이후 이 상상의 경계는 우리말로 ‘국민’, ‘민족’ 등으로 번역가능한 ‘네이션’(nation) 위에 형성된다.
현대의 안전망 체제에서 국민국가는 국경을 기반으로 해 ‘사회’의 단일공간을 구성했다. 예컨대, 20세기 경제의 핵심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것이 국민국가의 거시경제정책이었다. 정부에 의해 수요와 이윤율이 관리되고, 적극적 세제와 사회보험 도입을 통해 시장에 대한 개입을 확산시키는 형태로 국가의 안전망 체계가 구축되었다(Rose 2008, 90~91). 이때 경제는 곧 ‘국민경제’의 형태를 띠었으며, 20세기 안전망의 리스크 관리는 국내총생산(GDP)과 국민경제의 대외경쟁력 확보를 위한 사회통합성 제고를 목표로 하며 전개됐다. 반대로, 80년대 이후 전 지구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철학이 확산되며 상상의 ‘단일 단위’로서 사회의 위기가 도래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기업가형 자아와 잘게 쪼개진 여러 작은 공동체 단위의 모델들이었다(ibid.).
기업가형 자아가 새롭게 추구한 것은 리스크의 단순 분산이나 회피가 아니라, 리스크의 적극적 끌어안기였다. 금융투자의 핵심 모티프 중 하나로 거론된 것이 ‘리스크 감수’(risk-taking)였다. 보다 포괄적인 표현으로 리스크 끌어안기(embracing risk)가 사용되기도 한다. 사회보험의 세계에도 리스크 감수의 새로운 마인드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의무가입 형태의 공적 사회보험들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 가족에 적합한 민간 보험 리스트를 스스로 찾아 리스크를 일부 감수하고 투자하는 적극적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ibid., 100). 저축은 게으른 것이 되었고, (전문가를 끼고) 수익률에 기반해 자기 투자경향에 맞는 상품을 찾아 투자하는 펀드형 투자방식 역시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했다. 예컨대 좋은 리스크와 나쁜 리스크가 존재하며, 투자자는 리스크의 질적 감별을 통해 후자에 대해서는 분산을, 전자에 대해서는 적극적 끌어안기를 시도했다(Baker 2007, 568).
정부가 공적 사회안전망 장치들을 축소할 때, 근거로 제시한 것은 보편적 의무보험 형태들이 수익보다는 손실을 낳는다는 것이었다(ibd.). 정부의 적극적 지출은 경제부양의 동기가 되기보다는 경제의 정체 요인이 된다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시장지향성은 90년대 말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이 되었고,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른바 ‘CEO 대통령’을 선출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반대로, 2008년의 먹거리 안전 이슈는 1997년 이후 시민사회를 지배한 기업가형 마인드에 조종을 울렸다. 두 가지의 시대정신들이 상충하며 촛불의 열기를 폭발시켰다. 첫째,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위험을 막아주는 국민국가의 적극적 책임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헌법 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촛불시위에서 터져나오며 촛불의 시대정신을 지배했다. 정부는 광우병의 위험으로부터 주권자인 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부여받는 주체다. 주권이 보편적 시민권이듯, 안전은 다시 한번 보편적 시민권의 원리로 소환됐다.
둘째, 개별 시민들이 자신에게 좋은 리스크를 감별해야 하듯, 대한민국의 CEO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이로운 외교와 그 리스크가 무엇인지를 감별해야 했다. 촛불집회 초기에 시민사회의 반발에 대응하며 정부가 과학적 설명과 더불어 제시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였다(장덕진 2008, 128). 하나는 시장지향성이 담긴 설명으로, 광우병 발병률의 낮은 가능성에 비해 한미 FTA 체결의 시장 진작 효과가 훨씬 클 것이라는 설명이다. 광우병은 위험하지만, 시장진작 효과를 감안해 끌어안을 수 있는 리스크로 간주됐다. 다른 하나는 외교적 관점으로, 양국 외교관계 유지를 위해 재협상은 불가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광우병 발병의 ‘가능성’이 정말 낮은지, 낮은 가능성조차도 한국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지, 나아가 그것이 외교 리스크와 교환가능한 것인지 자체가 합의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안전의 보편적 권리 요구와 리스크 감수의 이 두 시대정신은 2008년의 촛불과 함께 격렬히 충돌했다.
요컨대, 당대의 정권을 낳은 시대정신이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거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전 지구적으로 2000년대를 경유하며 리스크 끌어안기의 원리가 한계점에 봉착했다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좋은 리스크를 끌어안기 위해서는 나쁜 리스크에 대한 계측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서며 테러리즘 및 금융위기의 문제가 터져 나오며 위험이 계측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제기됐다(Beck 2006, 337; Baker 2002). 미국에서는 9.11 테러가 분기점이 되었다. 테러가 계측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통제될 수 있을까? 수많은 논란을 안고 출입국관리의 반인권적 집행이 이루어졌고, 이라크에 대한 (리스크) ‘예방 전쟁’이 시도되었다(Beck 2006, 337).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노동의 불안정과 맞물리며 난민과 이주노동의 이슈를 전 지구적으로 부상시켰다. 역시 난민의 노동력은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는 방어적 감각들이 유럽을 중심으로 시민사회를 휘감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 리스크 끌어안기의 시대감각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그 한계점을 드러냈다. 관리가 불가능한 위험은 사회 구성원들의 안전감각을 바꾸게 마련이다. 징후로만 나타나던 그 변화의 감각들이 6년 후 세월호 참사를 만나며 대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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