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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04
    [칼럼/작은 책 6월호] 정의당의 선택

정의당의 선택


총선에서 나는 정의당에 투표했다. 2020년 총선은 수구 우파 몰락의 선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보정당 질서 재편의 계기가 아니었나 한다. 나는 정의당의 비례대표 전략을 지지했다.

전 세계적으로 개방형 경선은 시대흐름 같은 것이 되었다. 개방형 경선은 기존 정당과 유권자층의 욕망 간 괴리가 커지면서, 이 괴리를 메우기 위한 방편처럼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가 개방형 경선으로 민주당 후보가 되며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와 함께 밀레니얼 청년들의 정치참여가 신드롬처럼 일어났다. 한국에서 정의당의 개방형 경선은 제도정치에서 주변화되었던 청년 여성들을 전면화했고, ‘엄마정치’라는 이름의 새로운 양육자 정치 패러다임을 선거의 장으로 인도했다.

개방형 경선의 정치적 메시지는 소수자 할당제와 인재 영입 전략에 담겨 있다. 이번 정의당의 개방형 경선 메시지는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받았던 민주노동당 시대와의 작별이다. 민주노동당이 준거했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울산에서도, 창원에서도 이미 쇠퇴했고, 정치적으로도 상당 부분 시대역행성을 갖는다. 민주노동당의 시대는 사실상 2008년에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애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이미 끝난 정치에 아직 애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이것이 2008년 이후에 진보정당들이 직면한 현실이다. 2008년의 시대적 특징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그 해는 민주당 집권 10년이 마감된 해다. 그 10년이 마감되며 청년층을 중심으로 거대한 정치적 환멸이 일었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은 역대 최저투표율을 기록한 선거들이다. 2008년 총선에서 20대의 투표율은 28%에 불과했다.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한국사회만의 시대 패러다임이 있었다. 권위주의 정부하에 약화되었던 시민사회에 ‘시민권’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87년 이후 본격적으로 열렸다. 민주노조 운동 역시 87년 이후 거대한 폭발을 보인다. 전노협(1990년)과 민주노총(1995년)의 설립, 민주노동당의 창당(2000년)은 모두 이 87년 체제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진보정당 운동의 흐름들은 그 운동세력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민주당의 집권과 맞물리며 발전했다.

(2004년 총선 후 진행된 여론조사 결과 민주노동당 지지층 특성: 출처는 강원택,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지지에 대한 분석>, [한국정치연구] 13-2, 2004, 150쪽)

민주노동당 등 과거 진보정당의 지지층들이 민주당 지지층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현행 40대인 1970년대생들이 이들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형성한다. ‘지역구 민주당, 비례 민노당’의 교차투표 공식은 2000년대 이후 선거의 주요 패턴 중 하나였다. 이들은 블루칼라보다는 화이트칼라인 경우가 많았고, 소득 수준도 중간층 이상인 경우가 많았다. 울산․창원 등을 거점으로 한 중화학공업 기반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슬로건은 상당 수준의 신화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이 신화와 함께 2000년대 중후반부터 진보정당의 청년층 지지 기반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괴리의 딜레마를 보여준 것이 2008년 총선과 촛불집회였다.

2008년 총선에서 최악의 투표율을 기록한 당시 20대는 놀랍게도 촛불시위의 주력 참여군이었다. 정치학자들은 이들을 ‘인지적 무당층’이라고 불렀다. 정치에 대한 입장과 지식은 충분한데, 정당정치에는 거리감을 느끼는 이들, 정당에 대한 일체감을 못 느끼는 이들이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 최대 유권자 집단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촛불 참여가 말해주는 바는 이들이 정치 무관심층이 아니라는 것, 반대로 진보정당들이 이들과 온전히 조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소비문화에 민감했다. 소비란 단순히 의식주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로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코드였고, 각 개인의 자아 정체감을 만들어 주는 키워드였다. 이들에게 촛불시위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현안의 해결을 넘어 익명화되고 파편화된 현실로부터 자아정체감을 되찾는 계기였다. 많은 이들이 여성이었고, 진보적 성향을 가졌으며, 새로운 시대상을 대표하는 인물에 반응했다. 안철수가 잠깐 사람들을 속이며 반짝했다. 박원순이 이들 다수의 지지를 업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무상급식, 청년수당의 도입 등 이들이 환호했던 박원순 서울시장 체제의 정책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진보정당의 정책적 노선 위기가 찾아왔다.

2008년 당시 무당파였던 20대 여성들이 2010년대 초 몇 가지의 거대한 문화적 신드롬을 경유하며 민주당 지지층으로 합류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이다.


길을 만드는 진보정치가 필요하다

존재감이 없었다. 이 존재감 없음과 병행해서 문화적 충격이 일어났다. 과거 언론불매운동에 타깃은 조중동이었다. 2016년까지는 그랬다. 2017년에 오며 촛불의 주력 집단이었던 3040 민주당 지지층들이 한경오를 불매대상으로 소환했다. 언론보도에서 87년 체제의 진영론이 붕괴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2018년에는 ‘수구진보’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때의 진보는 진영론의 한 입장이고, 수구는 이른바 ‘운동권 아저씨’ 문화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뜻한다. 형용모순 같은 이 말이 대중동원의 프레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세계상이다.

진보정당의 정체성은 이렇듯 이미 혼란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기존 진보정당 지지층 일부는 민주당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민주당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이번 총선에서 이른바 ‘나정찍 이안찍’(‘나 정의당 찍었던 사람인데, 이번엔 안 찍어’)을 선언한 이들이 이런 경향에 해당한다. 이들 중 다수는 정의당의 비례후보에 청년할당으로 2030 여성 정치인들이 뽑힌 것에 반발하기도 했다. 그 반대편에 놓인 현실이 메갈리아 이후의 페미니즘 운동과의 관계에서 드러났다. 2016년 넥슨 성우의 해고 사태에 대해 드러낸 정의당의 모호한 태도는, 반(反)페미니즘 진영의 반발 못지않게 당 내 페미니스트 집단의 좌절과 탈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혼란의 시작이 정체성의 동요에 있었듯, 변화 역시 정체성 재확립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2017년 대선이 일정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선거 이틀 전 수행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20대 여성이 가장 압도적인 심상정 지지층임이 밝혀졌다(18%). 반대로 진보정당의 주력 지지층이었던 40대 남성은 상당 부분 지지대열에서 이탈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4%). 심상정으로 대변되던 노동정치의 변곡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넓게 보면, 정치 패러다임 일반의 변화 속에서 이를 해석할 수 있다. 20세기 사회운동의 패러다임은 기본적으로 당위와 보편성의 호소에 기반했다. 87년 민주화 체제하에 20대를 경험한 현행 40대들에게, 특히 40대 화이트칼라 남성들에게는 이 당위와 보편성이 자신들의 것이라는 강력한 자의식이 존재한다. 이 자의식 속에서 그들이 노동자 정치세력화 슬로건을 자기화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이들 일부가 떠나는 과정에서 정의당이 지지율 상승을 경험했다는 것은 새로운 기대와 방향감각을 부여하며 당 지지층에 합류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2008년 이후의 새로운 시대감각들은 일상에서 체감되는 필요에 직접 반응하는 경향을 보였다. n번방에 대응하여 진행된 디지털 액티비즘, 정의당 비례후보의 양육자 정치는 이러한 시대감각에 조응하며 일어났다. 이번 정의당의 개방형 경선은 진보정당에 깊숙하게 들어오지 못했던 인권활동가들, 여성정치인들로 정당의 외연을 넓힌 계기였다. 넓어진 외연 속에서 더 많은 당사자 정치의 계기들이 꽃피길 기대한다. 진보정당은 잃어버린 가치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할 과제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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