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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책 7월호] 내 운동을 오인한 시대
  2. 2020.05.30
    [5월 이슈페이퍼/시민정치시평] 코로나19와 함께 어떤 민주주의 소통 모델이 오는가

내 운동을 오인한 시대


“무엇보다, 피해자 ‘그 인간’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한겨레』 5월 27일). 일본군 ‘위안부’ 증언팀에 합류했던 양현아 교수가 증언 기록에 대해 한 말이다. 증언이라는 것은 시대 담론과의 투쟁을 경유하며 형성된다. 증언자의 언어가 공적으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해하고 기록하며 공감할 청취자 집단이 존재해야 한다.

그 첫 청취자의 역할을 한 이들이 증언을 기록한 활동가와 지식인들이었다. 과거사의 경우, 피해당사자들이 공론장의 개념에 익숙지 않다는 점, 그들의 경험과 기억이 대체로 ‘글’보다는 ‘말’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 교육받은 운동가 집단의 기록을 필요로 했다. 운동가는 증언자에게 말을 걸었고, 증언자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이 과정들은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난한 노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사랑’이 필요했을까? 운동가들이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당대 운동가들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말이라 생각한다. 80~90년대 대학가에서 운동가의 자아를 표현했던 대표적 비유가 ‘함께 맞는 비’의 비유였다. 연대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함께 맞는 것이라는 말은 너무나 낭만적이었고, 그만큼 많은 이들의 가슴을 휘어잡았다. 그런데 현실은 간단치가 않았다. 모두가 같은 지반 위에 있지도 않았고(대학 출신들은 돌아갈 곳이 있었고), 누군가는 비 맞는 일 이상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 비 맞는 ‘피학의 행위’가 낭만화되는 이유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양현아 교수는 위 문장에 이어 이렇게 덧붙인다. “고백하자면, 증언팀의 연구자들은 증언자들과의 관계를 지속한 경우가 별로 없는 것으로 안다. 증언연구가 끝나자 우리는 각자 살길이 바빠서 할머니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던 것이다.” 당대의 기록들, 사후 인터뷰들을 찾아봐도 사회운동에서 이런 이별이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비 맞는 행위’에 감화되었던 운동가들은 무엇보다 운동에 투신한 자신의 고난을 사랑했다. 이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사랑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오인할 때 발생한다.


운동하는 나를 사랑한 시대

한국에서는 1980년대가 지식인 사회참여의 분기점을 형성한 시기였다. 80년대는 우선 70년대와의 결별을 통해 나타났다. 70년대까지의 역사인식은 패배주의적 사고가 지배했다. 20세기의 서막을 장식한 것은 피식민지배였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이 시작됐으며, 60~70년대의 20년을 군사독재가 지배했다. 1970년대 문학 역시 민중을 작고 짓밟히는 존재로 그리는 경향이 강했다(조세희의 ‘난쏘공’).

(1985년의 구로동맹파업. 80년대 들어 대학생들의 현장 이전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주요한 결과 중 하나가 연대파업을 이룬 구로동맹파업이었다.)

80년대의 전환은 박정희의 죽음에서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며 나타났다. 민중은 이제 짓밟히는 존재에서 봉기하는 존재(광주항쟁)로 인식 전환에 성공한다. 1983년 평전의 출간과 함께 사람들은 민중이라는 이미지에서 전태일을 발견했다. 이 시기 사회운동의 시대정신을 요약한 구호가 ‘열사정신계승’이었다.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가장 근본적인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분신’은 죽음을 공적 공간으로 인도했다. 죽음이라는 소멸의 과정들은 놀랍게도 개개의 살덩어리에 불과한 인간들을 세계의 거대한 대의 앞에 데려다놓았다.

세계변혁의 열망만큼 그 열망을 내면화한 자신에 대한 사랑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대의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글을 통해 구성된 개념의 세계다. 예컨대, 평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손에 잡히는 것인가 아닌가? 길가의 어느 누구도 자기 이름 앞에 민중이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는다. 동일한 ‘민중’의 주체성이 광주항쟁을 전후로 갑자기 변화된 것은 그 시기를 기점으로 (현실 못지않게) 지식인들의 자의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70년대는 무기력의 시대였다. 그러나 80년대는 달랐다. 이때부터 노동문학이 붐을 일으켰고, 한국사회의 체제전환이 당면한 것처럼 사회과학 논쟁이 전면화됐다. 무대가 열렸고, 공론장의 주체가 바뀌었다.

이들이 최근 계속 회자되는 386의 존재다. 60년대 초반생의 대학진학율은 절반 이하였다고 하니, 이들은 60년대생 중에서도 엘리트의 지위를 갖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숫자 ‘3’이 가리키는 것은 이 개념이 이들이 30대가 된 9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10년이 지나 헌정 사상 첫 정권교체가 일어났고, 참여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화두가 등장해 386을 체제 안으로 흡수했다.


엘리트 동맹의 환멸 이후

386이란 민주화 이후 정권의 하위파트너로 제도 진입에 성공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특정 연령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특정 세력에 대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정권 차원에서 시민사회로부터 통치 파트너를 끌어오겠다는 구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이후 ‘참여정부’와 함께 계승된 참여민주주의의 화두였다. 핵심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런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 이상 큰 정부를 소환할 수는 없다. 작은 정부를 유지하되, 시민사회의 힘을 빌려 관료와 권력기관들을 개혁해야 한다.’ 참여연대를 비롯해 일부 시민단체들이 먼저 움직였다. 교수와 주류 대학 출신의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정권의 하위파트너로 합류하며, 사실상 87년 체제의 엘리트 동맹이 시작되었다.

(촛불시위의 역사적 변별점은 시위의 인구학적 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

이 엘리트 동맹의 반대편에서 민주당 정권 10년의 몰락과 함께 퍼져나간 것은 시민사회의 환멸이었다. 이명박은 역대 최저의 득표량으로, 가장 압도적인 대통령 당선자가 된다. 그리고 그 환멸과 함께 부상한 것이 촛불이라는 새로운 대중시위였다. 촛불에 누가 참여했고, 어떤 화두가 수반되었을까? 첫째, 유모차 부대, ‘배운녀자’ 신드롬 등이 2008년 이후 부상했다. 청소년들의 참여도도 높았는데, 이는 정치에서 주변화되던 이들이 촛불과 함께 공론장의 중심으로 올라왔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깃발 논쟁이 반복되었다. 백골단이 사라진 자리에 경찰 차벽이 들어섰고, 격렬한 몸싸움이 약해지면서 ‘문화제’가 집회의 범례적인 패턴이 되었다. 요컨대, 전선의 앞, 즉 전위라는 개념이 모호해졌다. 깃발은 이전까지 전선의 앞에서 그 전선 자체를 대변한다고 간주되었다. 2016년에 오면 깃발 논쟁은 사라지고, 모두가 자기만의 깃발을 가져오며 이색깃발의 향연을 열기 시작했다.

모두가 각자의 이름을 갖는 시대, 누구도 촛불을 대표하지 않으며, 모두가 여러 촛불의 작은 마디가 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사랑의 방식이 바뀌었다. 아무도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지 않는다. 서지현의 사례를 보자. 사람들이 전태일에게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그의 일대기였다. 그 일대기에서 어떤 모델이 축출되었다. 그러나 서지현에게서 사람들이 읽는 것은 용기이지 모델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와 자신이 닮았다고 하지(‘미투’), 그를 계승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피해당사자’라 불리던 이들의 주체성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세월호 유가족은 유가족 운동에서 최초로 시민단체와 분리된 자신들만의 대변인을 만들었다. 안희정 성폭력 재판 후 피해자 김지은이 쓴 글을 그의 대리인이 낭독했는데, 쓰는 자와 말하는 자가 바뀐 이 장면은 사회운동사의 한 변화를 응축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최근에는 김지은의 책이 출간되었다). 이제 아무도 이들의 언어에서 보편적 가치가 사라졌다고 하지 않는다. 운동과 함께 운동의 감수성과 자의식이 변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이들이 아니라, 한때 민중의 호민관을 자임하던 이들이다. 나를 오인하던 시대, 내 행위의 고난을 사랑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And

코로나19와 함께 어떤 민주주의 소통 모델이 오는가


고태경


방역의 성공을 민주주의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코로나 이후의 한국사회를 상상하며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코로나 방역 국면에서 국제사회의 화두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정부의 리더십 문제다. 뉴질랜드, 한국, 대만, 독일, 덴마크 등이 방역에 성공하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투명한 정보공개로 국민적 신뢰를 이끌어낸 독일 총리 메르켈, 적극적인 초기 대처로 확진자 제로 상태를 이끌어낸 뉴질랜드의 아던 총리와 한국의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의 아노미 상태에서도 극적인 지지율 상승을 경험 중이다. 한국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을 정부의 수장으로 둔다는 점, 방역 실패의 대표적 사례들이 우파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받고 있다.

그 반대 국면에 놓인 나라들이 미국, 브라질, 일본, 영국 등이다. 아베는 도쿄 올림픽 개최에 맹목적인 태도를 보였고, 트럼프는 증시 변동에 촉각을 세우며 초기 대응을 방관했다. 지지자들과 집회를 강행하고 물놀이를 즐긴 브라질의 보우소나우, 일상을 즐기라고 말하다 스스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영국의 보리스 존슨까지 일부 지도자들의 ‘기행’ 역시 국제사회의 새로운 스캔들이 되고 있다.

언론들은 이 우파 스트롱맨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매몰돼 눈앞의 팬데믹을 부인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재난은 아노미 상태를 유발하며 리더십의 근간을 흔든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방역의 출발점이 정부의 시민사회에 대한 신뢰였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를 믿지 못하면 팬데믹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투명하게 공론화할 수 없다. 2008년 금융위기의 재난상황에서 우파 스트롱맨들은 난민과 이주민 등에게서 가상의 적을 발견했고, 그들에게 재난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의인화될 수 없었고, 코로나19는 각자의 안전을 모두의 안전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재난국면을 연출했다. 이 재난국면의 소통모델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방역은 정치적 소통의 문제다

방역이 소통의 문제를 수반한다고 할 때, 그 문제가 실천으로 연결된 것이 거리두기 참여였다.

거리두기에 대한 많은 우려가 있었다. 그것이 우려를 낳은 것은 사회적 약자를 고립화할 가능성, 사회의 파편화라는 시대현상을 가속화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좁게는 2008년 이후, 넓게는 1997년 이후의 시대상을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가 각자도생의 정신이었다. 세월호 참사의 비유를 빌리면, 안전망도 컨트롤타워도 사리진 채 십수 년의 ‘국가부재중의 민주주의’ 상태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각자도생의 파편화는 다시 디지털 생태계의 원리들과 맞물리며 디지털 반향실(echo-chamber) 효과라는 현상을 낳았다. 온라인 연결관계는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경향을 낳는다.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갖는 이들이 온라인 매체를 타고 연결될 때, 사람들은 세계를 자신의 메아리로 가득 찬 공간으로 착각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권을 기점으로 카카오톡 단톡방이 고령층 우파들의 정치적 연결을 촉진하는 플랫폼으로 떠올랐다. 전 지구적으로는 유튜브가 우파 음모론의 새로운 서식지로 부상 중이다.

방역의 성공은 디지털 반향실의 이 착시효과를 억제한 것과 연관된다. 그 억제의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는 정보 수용자의 태도 변화였다. <뉴욕타임즈>의 한 기사에 따르면(기사 링크), 미국에서 거리두기가 시작된 후 전체 디지털 접속량 중 당파적 매체 접속도는 줄고, 지역방역 정보를 전달하는 로컬 매체의 접속도가 크게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정치적 세계관보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더 갈구했다.

(미국 내 로컬 미디어 접속량 추이: 출처는 뉴욕타임즈 기사)

다른 하나는 방역 당국들의 일종의 큐레이팅 작업이었다. 큐레이트(curate)의 라틴어 어원은 cura, 즉 돌봄(care)으로, 큐레이팅이란 사물을 돌보는 것 혹은 사물들 간의 관계로 길을 안내하는 행위를 뜻한다. 팬데믹의 아노미 상태에서 방역 큐레이팅의 작업을 담당한 것이 질병관리본부의 일간 브리핑이었다. 뉴질랜드의 방역 성공을 묘사한 한 칼럼은 일간 브리핑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회는 [반향실의] ‘여러 거품들’ 속으로 파편화되고, 사람들은 공유된 목적과 이해에 기반해 경험을 서로 연결하지 못한 채 분열된 온라인 서식지들로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의 메시지 전달, 특히 일간 브리핑은 우리의 현실들을 상호연결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위기와 직면해 상호연결되어 있으며 통합되었다는 감각을 갖게 했다.”(칼럼 링크)

통합과 연결의 감각은 정부와 공권력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많은 이들을 공론장으로 돌아오게 했다. 20세기 말부터 정치학에서 새로운 화두로 부상한 것이 정치적 독립층(independents), 우리말로 무당층의 거대한 확산이었다. 독립층의 부상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정치 효능감의 부재다. 내 실천이 공적 관계망을 바꾸는 데 유효한가, 나의 개입이 내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실질적인 움직임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정치적 효능감의 물음이다. 정치적 대표성의 실효성 상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정치권 엘리트들과 대중의 삶을 분열시키고, 금융위기 이후 엘리트 권력에 분노한 거대한 아스팔트 우파 집단들을 낳았다.

한국에서 이 정치적 독립층은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을 낳은 2007~2008년에 극대화되었다. 반대로, 2020년의 팬데믹 구간은 이 정치 효능감을 폭발시키며 공론장을 가득 채우게 된다. 21대 총선은 21세기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한 총선이었다. 왜 정치적 효능감은 이 거리두기 구간에서 높아졌을까? 아마도 그것은 팬데믹이 모든 관계질서들을 재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명의 지침 위반이 전국적인 확진자 증가세로 번지는 코로나19의 전파력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책임감을 강화시켰다. 방역 지침과 바이러스 전파 추이를 안내한 일간 브리핑은 이런 점에서 단순한 정보전달이라기보다 시민들을 이 책임의 연결망으로 안내하는 재난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거리두기는 파편화보다는 전 국민적 연결감각을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여민주주의’로는 부족하다

소통이란 쌍방향의 주고받음 행위를 의미한다. 정부의 방역지침 전달과 호응하며 부재중이던 국가를 공론장의 컨트롤타워로 세운 것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방역지침 실행이었다. 여기서 방역의 큐레이팅 작업이 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쌍방향에서 일어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태원발 확진자 증가 추이에서 성소수자 혐오 억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들은 일부 지자체들이 익명 검사를 실행하도록 강제했다. 경기도에서 이주민을 배제했던 재난기본소득은 시민들의 항의에 의해 (불완전한 수준이지만) 이주민 일부를 수용하게 된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코로나 인종차별 반대 시위: "나는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방역의 거대한 열정은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분노로 크게 전환되지 않았다. 이것이 유럽 및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시아인 인종차별의 집단심리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팬데믹 구간에서 형성된 이러한 흐름들을 우선 기존의 ‘참여민주주의’ 모델에서 분리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참여정부’에서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참여민주주의란 사실상 친정부적인 시민단체들이 정부 행정의 하위파트너로 흡수되는 것을 의미했다. 상당수의 시민단체 엘리트들이 정부의 콜을 받았고, 민관협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처럼 각광받았다. 그러나 이 모델은 민주주의의 미래상이라기보다는 친정부 엘리트 간 동맹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386의 세대 내 동맹은 이 흐름 속에서 견고해졌다.

반대로, 오늘날의 정치적 독립층들은 이러한 엘리트 카르텔에 냉소를 보이며, 본인들이 공적 의사결정에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연루되기를 바란다. 팬데믹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가능케 했다. 우리는 팬데믹이 일상의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그 변화시킴의 연결감각에 주목해야 한다. 디지털 뉴딜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원격의료의 도입이 아니라 바로 이 소통의 효능감을 높이는 모델의 발견이어야 할 것이다.


* 해당 칼럼은 프레시안에 실림(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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