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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4
'Authenticity'의 의미 및 번역어 문제
최근 이 개념의 번역어로 ‘진정성’, ‘자기진실성’ 등이 자주 활용되는 듯하다. 나 역시 얼마전 논문에서 ‘진정성’이라 번역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부적절한 번역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말로 ‘진정성’과 ‘진실성’은 거의 비슷한 어감을 갖는다. ‘***의 말에 진정성이 없다’라고 하면, 그의 말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의 말이나 행동에 진실성이 없다는 게 된다. 내면과 현상 사이의 일치라는 화두는 근대도시문명의 등장과 함께 부상했는데, 이에 어울리는 개념이 sincerity다. 우리말로 ‘진실성’ 혹은 ‘진정성’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게 이 단어다. 리오넬 트릴링은 <햄릿>을 분석하며 이 개념을 흥미롭게 해석하는데, 세익스피어의 동시대인인 마키아벨리가 세익스피어의 반대방향으로 내면과 현상을 분리시키려 했다는 점이 또한 주목될 수 있다.
authenticity는 진실함의 문제가 아니라, ‘훼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근대도시문명, 상품물신주의, 소외 등으로 훼손된 무엇에 대한 가치지향이 반영된 것이 ‘authentic’한 것에 대한 열망이다. 이 단어의 근대적 의미가 박물관에서 왔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원본’이라는 뜻이고, 그 반대어가 ‘복제품’, 즉 ‘가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서 ‘가짜’가 된 듯한 자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인식으로부터 훼손된 것에 대한 복원의 열망을 갖게 된다. 사실 그 훼손된 것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발명되어야 할 것, 혹은 실존적으로 투사되어야 할 것에 해당한다. 이게 하이데거의 유사 개념 ‘Eigentlichkeit’가 국내 번역자들에 의해 ‘본래성’으로 번역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존재와 시간> 영어번역자들은 이 개념을 authenticity로 번역함).
eigentlich, 즉 ‘본연의’, ‘고유의’라는 뜻인데, 앞서 말했듯 이것은 ‘실체’로서 원래 있던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으로, (하이데거식으로 말해) 양심의 부름에 답하며 발견해야 할 무엇이다. ‘본래성’은 원래 실재로 존재했던 것을 뜻하는 뉘앙스가 있다. 나는 ‘본원성’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본원성은 미학적인 것과 연관된 것이고, 많은 경우 미적 연출의 화두와 관련된 것이지(그래서 근대문학의 화두와 연결된다), ‘진정성’과 같은 마음의 진실함의 문제는 아니다. 이걸 진정성으로 번역하면서, (80년대 사회운동에 대한 연구에서) 근대 사회운동 멘탈리티의 구조적 기원이 인지되기보다, 과거의 지나간 낡은 감성만 강조되는 경향이 생긴 듯하다.
이 개념의 역사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고전적 문헌으로는
- Lionel Trilling, Sincerity and Authentici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아마존 링크)
- Marshall Berman, The Politics of Authenticity: Radical Individualism and the Emergence of Modern Society, Verso, 1970(아마존 링크)
트릴링의 책은 문학사 연구의 형태를 취하는데, 어차피 이 개념 자체가 미학적 개념이라 내용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버만의 책은 계몽주의 시대에 본원성의 감각이 당대 대표적 사상가들에 의해 어떻게 사고되었는지를 밝히는 책이다. 루소 등의 계몽사상가들의 말을 과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요약하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참고할 만한 텍스트다.
찰스 테일러의 <본원성의 윤리>라는 책이 <불안한 현대사회>라는 제목으로 한글번역되어 있다. 자주 인용되는 책인데, 사실 이 책은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니라 단상 형태의 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본원성의 역사와 관련해 주목할 또 다른 개념이 독일어 빌둥(Bildung)이다. Bild가 '이미지'라는 뜻을 갖고, 동사형 bilden이 '건축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빌둥은 이미지를 건축하다라는 맥락에서 근대의 주요 개념으로 부상했는데, 이때 건축되어야 할 이미지가 바로 근대인의 '자아'다. 근대 계몽주의가 추구한 자아 빌둥의 서사가 18세기 이후 근대소설의 핵심 모티프가 된다.
우리말로 번역할 이 개념의 마땅한 단어가 없다. 그래서 가장 흔히 활용되는 번역어가 '교양'인데, 우리말의 이 속물적/부르주아적 뉘앙스는 원래 빌둥의 18~19세기적 원천과 약간 괴리되는 부분이 있다. 빌둥은 근대의 거의 모든 급진주의 사상의 원천인데, 왜냐하면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자체가 근대사회에서 훼손된 무언가를 되찾아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외적 환경에 맞서 저항하는 급진적 개인주의의 모티프가 이 빌둥의 감각에서 왔다.
그런데 이 훼손된 자아는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본원성의 모티프가 그렇듯, 이것은 원래 있었던 것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스텔지어의 열망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교육의 열망이었고, 교육을 통한 진보의 열망이었다. 학교의 관제적 교육이 아니라, 좀 더 넓고 포괄적인 의미의 계몽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교육을 통해 나를 찾아가는 이 열망은 한국의 사회운동에서도 전태일의 사례, 80년대 야학의 사례 등에서 나타났다.
문자를 매개로 직접적인 '나'의 사생활공간을 넘고, 동시에 공동체나 국가에서 위로부터 부과하던 (관제적 의미의) 공적 가면을 벗어나는 이 과정은 근본적으로는 제3의 대안적 자아를 찾아가는 것에 가깝다. 18세기부터 지난 세기까지의 이 과정은 문해력을 통해 나를 (세계의 보편성으로) 확장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게 본원성의 근대적 형태이고, 그 근대적 형태의 키를 쥔 단어가 빌둥이다. 21세기는? 그건 내 연구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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