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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에 묻는 내 노동의 의미


고태경

노동절에 참여하며 갑자기 ‘나는 그동안 무슨 생각으로 노동절 집회에 참여했을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한 번도 던져 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는 데 우선 놀랐다. 아마 참석이 당위처럼 다가온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동절 후기를 써야지 생각하면서는 좀더 구체적인 물음을 던져봤다. ‘내게 노동은 대체 뭘까?’

‘내게 노동은 뭘까?’ 이 질문으로 노동절 후기를 대신하고 싶다. 우리는 2020년 5월 1일, 여느 때와 같이 서울 모처의 광장에 모여 노조 대표자들의 발언을 들었고, ‘투쟁’의 구호를 외쳤으며, 청와대 행진을 외치는 이들과 함께 있었다. 코로나19로 참석자들은 소규모였고, 청와대 행진에 화답하는 대오는 많지 않던 것으로 기억한다(내가 속한 단체도 청와대로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집회의 풍경이라기보다 집회의 발언을 듣는 내 마음이 아닌가 싶다. 

첫 노동절 집회 참석은 딱 20년 전이었다. 노동절 전야제로 열리는 4.30문화제를 위해 고려대에 갔다가 경찰에 봉쇄당한 기억이 있다. 고대 앞 공중전화박스로 뭔가가 날아가며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던 기억, 대학 담벼락 쪽에서 일부 대오가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거리에 서서 어리둥절 봤던 기억이 있다. 사회과학 서적과 집회 분위기로 ‘노동자의 삶’에 대해 생각하던 내게 ‘노동’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른 것은 책임감, 무거움 같은 것이었다. 그해 추석 연휴 고향의 작은 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정말 진지하게 공장에 들어가서 선배들처럼 뭔가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 엄마에게도 마치 세상의 진리를 알게 된 사람처럼 암호 같은 말을 토했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에는 확신이 없었다. 물리적인 부지런함,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헌신성 같은 것이 부족한 내게 선배 운동가들의 활동은 어떤 짓눌림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막연한 것이라기보다 짓눌림, 무거움 같은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다시 몇 년 후 대학원 수업에서 한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던 적이 있다. “이 사회에서 어떤 게 노동이에요?” 이 질문은 맥락상 ‘어떤 게 노동으로 인정돼요?’라는 물음이었다. 이 질문에 내가 한 대답은 이런 거였다. “자본에 결합된 노동이요.” 물론, 자본에 결합된 노동들 사이에서도 다시 성별에 따라, 학력에 따라, 피부색에 따라, 장애의 정도에 따라 노동의 가치평가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 질문을 받았던 게 2007년이었다. 그 물음에 답을 한 지 딱 3년 후 출판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왜 나는 동기부여를 잃은 일로부터만 보상을 받는가

드디어 수업 시간에 말했던 ‘자본에 결합된 노동’이 시작되었다. 통장에 매달 월급이 찍히는 게 내 몸과 마음에 이렇게 평온을 가져다줄 줄은 몰랐다. 출판사 취직 전에는 한의원부터 여러 병원들을 주기적으로 찾아다녀야 했다. 월급이 한약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놀랍게도 어느 순간부터 크게 아프지 않았다. 비교적 얻어먹는 위치에서 살았던 터라, 이제는 밥값, 술값을 내가 먼저 내야 한다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의무감도 생겼다. 월세와 고시원 살이를 정리하고, 전세방을 얻으며 이래서 직장생활 직장생활 하는구나 생각했다.

이때 내게 노동은 뭐였을까를 자문해 본다. 놀랍게도 노동의 정의는 그 이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운 좋게 정규직으로 입사를 했을 뿐, 노동에는 여전히 여러 층위가 존재하며, 나는 여전히 당위와 의무로 노동절 집회에 참석했다.

‘자본에 결합된 노동’은 일단 재미가 없었다. 첫 책, 둘째 책은 열심히 만들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마음으로부터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이 노동에 보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이 나는 늘 생경했다. 공익근무를 했던 2000년대 초반, 나는 평생 학문을 연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가장 가기 싫었던 곳이 대학원이었는데(난 돈 내면서 공부할 마음이 없다), 내 학문적 노동이 ‘자본에 결합된 노동’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에서 ‘학위’라는 이름의 자격증을 따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내 인생이 꼬였다는 걸 느꼈다. 20대의 삶에서 가장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시간은 놀랍게도 대학원 시절이었다. 내 시간이 쪼개진다는 느낌, 내가 원치 않는 텍스트를 의무이수 학점 취득을 위해 (돈을 내면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내 몸과 마음을 소진시켰다.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내 학문적 노동은 대가를 받기보다 왜 대가를 지불해야 했을까. 이 질문의 반대편에 놓인 것이 출판사 시절의 직장생활이었다. 왜 나는 동기부여를 잃은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기적으로 보상받는 걸까? 물음이 이어졌다. 나는 왜 내가 가장 충실하고 마음을 쏟아붓는 일에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가장 게으르고 이기적인 곳에서 대가를 받는 걸까.

노동이 내 삶의 가치지향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 인지한 것은 20년 전이었다. 그래서 이 불합리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 남은 ‘노동’의 개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움이 좀더 약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경제탈락자’의 노동 개념

얼마전 홍남기 기재부장관이 기본소득에 대해 한 말이 ‘그것은 경제탈락자들을 위한 정책이다’라는 것이었다. 경제탈락자라니... 이 색히기가 진짜... 단전으로부터 올라오는 깊은 빡침을 느꼈다. 

취업 5년 후, ‘경제탈락자’가 되었다. 노동시장 밖으로 나오며 인생의 제3막이 열렸다. 여기서부터 내 노동의 감각이 쪼개지고 파편화되기 시작했다. 퇴사와 함께 학문활동에 몰입하고자 했으나, 당장의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모 출판사에서 진행한 평론상, 모 연구소에서 진행한 논문상 상금으로 생계를 보충했다. 4년간은 겨울마다 진행된 논술첨삭지도로 생계를 다시 보충했고, 최근 2년간은 청소년 노동인권 교육으로 다시 생계를 지탱했다.

평론상, 논문상 같은 걸 받으면 연구자로서의 삶에 변화가 생기길 기대하기 마련이다. 몇몇 청탁이 있었고, 싣기로 한 원고가 잡지사의 황당한 태도로 나가리되는 일이 일부 발생했다. 한번은 청탁하겠다며 우리 동네로 와 내게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해 설명해 보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 평론지 편집위원이 있기도 했다. 통장에 잔액이 좀 나아졌지만, 아무튼 딱 거기까지였다. 학문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좀더 벌었다는 느낌, 책으로 낼 수 있는 원고 하나가 늘었다는 느낌 이상이 없었다.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왜 집에만 박혀 있냐? 네가 아무리 좋은 글을 써도 연구자들 커뮤니티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네 글 아무도 안 읽어.” 본인이 체감한 현실일 테고, 나 역시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모두가 ‘인싸’(인사이더)가 되고 싶어하고 그 커뮤니티 내에서 상호 인정의 관계망을 구축하길 원한다. 그간 내게 원고를 청탁했던 사람들을 보며, 한 가지 확실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대부분 나를 이미 알고 있거나, 내가 발표자로 참석한 포럼에 같이 (패널로, 청중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인간은 익숙한 것에 반응하며, 낯선 것에는 먼저 의혹을 던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사회가 인맥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내게 새로웠던 것은 노동의 가치평가가 이 인맥의 인정투쟁 속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무슨 일하세요?’ 노조투쟁에 연대를 가서도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어떤 일하는 분이세요?” 여기서부터 답이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공부요, 라고 처음엔 답했다가 고시 공부하는 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어서, 학문연구를 한다고 답을 바꿨다. 학문도 미디어학, 정치철학, 사회학 등의 어느 한 경계에 있지 않기에(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그렇다), 말 할 때마다 전공 분야는 달라진다 ― 그냥 상대가 가장 익숙해 할 것 같은 전공을 말한다.

학문을 한다고 하면 그 다음에 제기될 예상질문에 나도 모르게 답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대학이나 연구소에 속해 있지 않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까. 최근에는 대학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탈한 이들이 ‘독립연구자’라는 말을 만들었다. 나는 그냥 나만의 연구소를 나만의 장소(집)에서 구축하기로 하며 연구소 블로그를 만들었다(내 연구소 블로그 링크). 이 초연결 시대에도 친숙함은 세상을 이해하는 렌즈로 작용한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 질문하는 이들이 아는 검증된 공간에 있는지 등등이 내 노동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청탁’의 인맥 네트워크를 벗어나기 위해, 지난해부터는 공식적인 심사시스템을 진행하는(저자명을 블라인드 처리한 채 심사절차를 진행하는)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논문을 실으며 더 이상 ‘자본주의의 대안을 말해보라’라는 식의 오만하고 멍청한 질문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가장 자유로울 것 같은 곳이 가장 폐쇄적이고, 제도권의 중심부라 간주된 학술지 시스템이 더 공정하다는 것은 큰 역설이다.

이 공정함의 역설 앞에서 느끼는 것이 내 노동의 설명불가능함이다. 상대는 간단한 답을 기대하고 물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길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까. 학문에 대한 기대, 학문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지만, 매순간 내가 자격증명의 상황에 놓인다는 압박감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가끔은 이 간단명료한 소통체계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내 노동이 세상으로부터 쓸모를 잃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 노동의 설명불가능함이 불러오는 느낌과 가장 잘 연결되는 표현이 ‘단절감’이다. 노동절 집회 참가자 중 내 노동의 현실에 공감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렇게 명료하고 단순하게 서술할 수 있을 것 같은 ‘노동’이라는 단어 앞에 내 언어가 설명할 힘을 잃기 시작했다. 노동절 집회의 연단에서 발언하는 노조 대표자들의 발언에 아무 공감을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 같다. 스테레오타입의 뻔한 발언을 듣기보다 차라리 비슷한 직종의 사람들끼리 둘러앉아서 자기 얘기를 이어가며 말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청와대 행진이라는 공허한 구호보다는 집회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온라인 공간으로 연동시켜 이어말하게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100년도 훌쩍 넘은 노동절을 지나며 갑자기 내 노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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