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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5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의 한글번역판에서는 ‘people’ 개념이 ‘대중’으로 번역되어 있다. 나는 한동안 이 번역을 오역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무페 식의 논의를 충실히 번역한 것으로 봐야 할지 고민했다. 당연히 포퓰리즘에서 people은 ‘인민’을 말한다. 트럼프가 이민자들을 배척하려 한 것은 그들의 ‘대중’으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인민으로서의 자격을 문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의 기원 중 하나로 소환되는 나로드니키 운동에서도 브나르도 운동은 주권자로서 인민을 향한 운동이다(교육을 통해 그들을 ‘진정한’ 인민으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
그러나 무페의 책에서는 인민이 아니라 ‘대중’으로 번역해도 문맥상 거의 문제가 없다. 실제로 무페가 거의 그런 식으로 개념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오늘 참여사회연구소의 메일링 서비스로 포퓰리즘 관련 토론회 소식을 받았다. 내용 소개에서 포퓰리즘을 설명하는 문구로 “다양한 가치들을 등가사슬로 엮고, 전선을 구축하는 운동”이라는 표현이 담겨 있었다.
무페의 포퓰리즘 개념규정을 그대로 적용한 이 문구는 대체로 이런 것을 말한다. 예컨대, 2016~17년 촛불시위에는 여러 욕망을 갖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누군가는 최순실의 존재를 혐오했고, 누군가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환멸을, 또 누군가는 새누리당 집권 10년에, 또 다른 이들은 위 사안들에 동의하면서도 여성혐오적 발언들은 막아야겠다는 신념으로 촛불에 합류했을 것이다. 최근 이슈화된 N번방 사건도 비슷하다. 아동청소년법 개정에 주목하는 이들은 아동/청소년의 보호를 말하고, 디지털 성폭력의 반문명성에 주목하는 이들은 폭력의 악마성에 집착한다. 그리고 이 이슈를 이슈파이팅하는 핵심 역할을 한 이들은 피해자의 거의 대부분에게 가해지는 여성혐오의 정서를 읽어낸다.
모두 다른 결들에 주목하면서도 ‘국정농단’과 ‘N번방’이라는 특정 기호들에 의해 하나가 된 것처럼 공론장이 형성된다는 것, 이것이 무페가 하는 포퓰리즘의 정의 방식이다. 개념정의가 이렇다 보니, people은 때로 인민이라기보다 대중에 더 가깝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런데, 이렇게 개념정의를 하면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말 자체가 공허한 말이 되고 만다. 모든 정치가 여러 모순과 욕망들을 특정 기호에 의해 사슬처럼 엮어낼 때 폭발한다. 이건 현대 정치의 일반적 패러다임이라 볼 수 있고,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공론장의 탈엘리트화가 시작된 후 보다 가시화된 현상이다. 따라서 ‘좌파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그냥 ‘좌파정치’처럼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반대로, 포퓰리즘 연구서들은 19세기 말 이후의 특정 운동들(예컨대 나로드니키 운동)을 포퓰리즘의 기원으로 삼고 있으며, 최근 십여 년의 포퓰리즘 인플레 현상 역시 유럽발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항상 특정한 정치유형을 가리키며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포퓰리즘은 현대 정치 일반의 패러다임이라기보다 특정의 정치 유형이라고 보는 게 나는 맞다고 본다. 그런데, 간혹 연구자들의 글을 보면 자신들에게 낯선 모든 현상들에 ‘포퓰리즘’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트럼프가 포퓰리스트인데, 어떻게 스페인의 포데모스도 포퓰리스트라는 거지? 둘의 공통점은 20세기의 기성 정치 패러다임과 다르다는 것 말고 어떤 공통점이 있지? 이런 물음에 나오는 답변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기성의 공적 합의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도래하는 게 포퓰리즘이니까.’ 포퓰리즘은 어느새 정치 유형을 특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증상을 말하는 개념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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