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와 ‘아직 죽지 아니한 자’
10월 31일 오전 사회적 참사 특별위원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세월호 조사 중간발표를 진행했다. 이 기자회견의 핵심은 고 임경빈 학생이 구조되었으나 해경의 방치 속에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응급구조를 진행하며 구조정에서 헬기를 기다렸으나, 헬기는 대국민 기자회견을 준비 중인 해경 수뇌부들만 태우고 가버렸다.
응급구조 과정에서 고 임경빈의 맥박은 뛰고 있었고 산소포화도는 69% 정도였다고 한다. 전문의들에 따르면, 일반인들의 산소포화도가 90% 이상이라는 점에서 임경빈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의 죽음을 단정할 법의학적 근거 역시 없다. ‘아직 죽지 않은 환자’. 유경근 전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당일 페이스북을 통해 밝힌 입장에서 등장하는 의학용어다. 임경빈은 살아 있다고 확언하기 어렵지만, 이미 죽었다고도 할 수 없기에 구조의 책임이 뒤따른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었다는 것, 그 경계에서 정부로부터 버려졌다는 것은 세월호 참사의 모든 진실을 응축하여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 전가된 리스크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에서 수없이 등장한 단어가 ‘안전’이다. 세월호 이후 쓰나미처럼 안전의 문제가 한국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메르스 사태와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가 바로 다음 해에, 강남역 살인사건이 다시 그 다음 해에, 그리고 고 이민호와 고 김용균의 죽음이 각각 2017년과 2018년에 한국사회에서 벌어졌다. 세월호 참사 당시 이런 의문들이 제기됐다. ‘단원고 학생들이 강남 학생들이었더라도 정부의 대응이 같았을까.’ 가정법으로만 남았던 이 질문은 대상만 바뀐 채 이후의 사태들에서 그 구체적인 답변을 찾기 시작했다.
메르스 사태와 강남역을 경험하며 여성혐오의 실체가 드러났다. 왜 메르스의 최초 전파자가 여성이라고 오보될 때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을까. 강남역의 범죄자는 왜 여성을 타게팅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죽음은 산업현장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됐다. 그 산업현장의 노동자들이 다같이 외주 하청노동자들이었다는 점, 심지어 모두 20대 이하의 청년이었다는 점은 오늘날 ‘위험’이 한국사회에 분배되는 방식을 알게 해준다.
현대사회에서 위험을 관리하는 방식에 등장한 개념이 리스크(risk)라는 개념이다. 리스크는 위험 그 자체라기보다는 위험의 확률적 개념에 가깝다. 그것은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말 그대로 확률적 가능성으로 계측되는 위험을 말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특정 개인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인구’라는 거대한 통계적 표본 속에서 작용한다. 예컨대 내가 지금 실업상태가 아니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누군가는 일정한 확률로 실업상태에 내몰리게 되어 있다. 고속도로가 하나 설립될 때마다 교통사고율과 고용률에도 일정한 변동이 나타날 것이다.
현대사회는 리스크의 이러한 계측가능성에 집중하며 발전했다. 현대의 사회안전망 관리정책은 리스크의 분산관리를 목적으로 하며 전개됐다. 사회보험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공제되어 실업상태에 있는 익명의 노동력에게로 분배되며, 실업과 산재 등의 개별적 위험들의 충격효과를 최소화하는 데 사용됐다. 개별 시민들에게 그대로 닥칠 때 거대한 충격이 이 리스크 관리를 통해 완화되고, 사회적 비용은 분산된다. 그러나 ‘세월호 이후’ 모든 것은 아노미 상태로 빠졌다.
세월호 이후 리스크의 관리체제에 근본적인 적신호가 켜졌다. 리스크의 계측가능성을 말할 때에 우리는 보통 교통사고율이나 실업률 등 통계화가 가능한 것들을 꼽곤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매일 목격하며, 보험보상과 제도 보완을 통해 충격완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세월호와 메르스와 강남역은 계측가능한 것도, 분산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세월호는 거대한 재난이 되었다.
계측불가능성과 아직 죽지 아니한 자
전 지구적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가 신호탄이었다. 한국사회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또 한 번의 신호탄이 되어 안전 감각의 전환을 일으켰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에 따르면, 리스크가 더 이상 관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자 사람들의 반응도 모순적인 두 흐름으로 양분됐다. 하나는 리스크 관리가 아니라 그 사전예방, 즉 주체의 제거를 호소하는 경향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누가 리스크를 몰고 오는가에 집중하며 분노를 쏟아냈다. 유럽에서는 난민이 그 대상으로 지목됐다. 미국에서는 이주민이 주목되었고, 트럼프라는 괴물 정치인을 부상시켰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20~30대 여성들과 성소수자들이 그 대상으로 호명되고 있다. 잠재적 리스크 담지자로 지명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위해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요구받는다. 이 사고의 흐름은 모든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극단적 배타성을 수반한다.
(2017년, 반난민 성향을 가진 헝가리 극우정당 지지층들의 시위)
이와 모순되는 또 다른 흐름은 자유방임의 철학이다. 사회의 상층부에 있을수록, 많은 기회자본을 가질수록 사람들은 세상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부동산 투기도 자유롭게, 노동도 근로계약 없이 자유롭게, 성적 관계도 자유롭게, 모든 것이 자유방임의 흐름 속에 진행될 때 아름다운 사회가 전개되리라 상상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리스크는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관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이 자유방임 철학의 이면을 구성하는 것이 리스크 전가의 체제다. 이 자유로움에서 해소되지 않는 리스크가 구의역 참사처럼 자유로움의 이면에서 약한 고리를 향해 폭탄처럼 쏟아지고 있다.
우리는 앞서 리스크를 확률적 개념이라고 했다. 그런데 확률적 계측과 통제가 불가능해졌다면, 그것은 이제 다른 개념으로 불려야 한다. 위험이 ‘가능성’의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선채를 뚫고 들어오는 물살처럼 우리 일상으로 직접 밀려온다면 말이다. 참사 당시 TV를 통해 바다 속으로 세월호 선채가 서서히 침몰되어 들어가는 것을 모두가 목격했다. 이 선채는 산소포화도 69%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빠진 고 임경빈의 위태로운 몸을 닮았다. 선채의 침몰을 바라보는 수많은 이들 중 어디까지가 삶과 죽음의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세월호 이후 연속된 참사들에서 구체적인 범주를 특정하며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임경빈을 버리고 헬기를 타고 기자회견장으로 간 해경의 권력 상층부 삶을 볼 필요가 있다. 자유방임의 철학에서 모든 리스크는 성공을 위한 기회비용으로 간주된다. 한동안 한국사회에서도 유행어가 된 것이 이른바 ‘리스크 감수’라는 표현이었다. 무한경쟁의 장에서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성공의 결실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되었다. 금융시장은 무엇보다 리스크 감수를 기본 덕목으로 하는 자본 경합의 장이다. 권력층에게 리스크가 얼마나 삶의 위협과 무관한지를 알려주는 표현이다. 해경 수뇌부들은 당시 최선을 다해 구조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 위해 ‘아직 죽지 아니한 자’ 임경빈을 버리고 헬기를 탔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이 기만적인 의전행위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안전의 아노미 상태가 그대로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권력층들의 의전행위로부터 삶과 죽음의 외줄타기를 하는 수많은 생명들의 삶은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가. 안전의 사회적 책임 확립은 이 괴리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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