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셜테이너 김제동의 고액 강연료
고태경
며칠 전 동거인과 잠시 김제동과 관련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최근 김제동의 고액 강연료 논란이 제기되었다. 대구 대덕구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아카데미의 강연에서 김제동이 받은 강연료는 1,500여만 원. 문제제기의 주체가 우파 정치인들이라는 점은 이들이 무엇을 노리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지 짐작케 한다. 김제동이 예능인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김제동의 1,500만 원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동거인의 주장은 명료했다. 유명 가수들은 행사장에서 노래 몇 곡 부르면 수천만 원을 받아가는데, 같은 예능인이 1,500만원 받는다고 문제 삼는 것은 과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수억 원씩 사회에 기부를 하기도 한다. 그의 강연은 대부분 인권친화적인 내용을 갖는다. 나는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사회운동이 주도하던 인권강의와 유명 예능인들이 받는 고액 강연료 사이에는 어떤 친화성이 있을까? 김제동과 같은 연예인을 보통 ‘개념’ 연예인이라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 생태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효리가,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정우성이 있다. 나는 이들의 진보적 발언과 고액 몸값 간의 모순적 공존이 지난 수십 년간의 복잡한 사회변화를 반영한 것이라 믿는다. 잠시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어떤 시대의 변화일까
2011년 힌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의 고공농성이 공론장에서 화제가 되며 희망버스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한 번에 만여 명이 타며 부산 영도로 향했던 이 투쟁의 흐름을 만드는 데에 많은 활동가들의 헌신이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주요한 역할을 한 이는 배우 김여진이었다.
2008년 촛불시위를 전후로 사회참여형 발언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소셜테이너’라는 조어가 등장했다. 이때의 기본적인 변화들을 기술해 보자. 사회운동은 90년대 이후 계속 위축되어 이미 친목모임처럼 축소된 상태였다. 90년대 이후 대학사회의 여러 정파운동들은 무너지거나 소수 활동가 체제로 이름만 유지하고 있었고, 노동조합은 단식과 고공농성 중심의 고강도 투쟁으로 고립되고 있었다.
2002년 촛불시위에서 기성 운동조직들과 ‘네티즌’들 간의 이른바 ‘깃발 논쟁’이 등장해 화제를 뿌렸다. 집회공간에 등장한 운동조직들의 깃발은 공론장의 수평적 소통을 저해하는 권위주의의 산물인가 아닌가. 깃발로 상징되는 전위적 리더십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자발성 마인드와 충돌하는가 아닌가. 아니 이 모든 논의들을 넘어, 노동조합, 진보정당, 인권단체들이 대중집회를 주도할 여력이 있는지 자체가 의문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시민사회에 여러 변화가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가 ‘참여민주주의’ 담론의 부상이었다. 참여민주주의 속에서는 모두가 서로에 대한 감시자이자 협력파트너가 된다. 비정부기구(NGO)들이 성장했고 이들이 정부의 감시자이자 협력파트너로 호출되었다. 대안사회의 이상형 이미지에 사로잡힐수록 관용은 줄어들고, 운동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사회운동은 세대재생산에 실패했다. 새로운 시민사회는 달라야 했다. ‘협치’라는 말이 등장하며 민과 관 간의 실용적 파트너십이 시대의 불가항력적 요구로 인식되었다. 자발성은 또 다른 시대의 화두였다. 2003년에 새로 들어선 정부의 이름이 이 파트너십을 강조한 ‘참여정부’였다.
샐러브리티들의 새로운 진정성
시민사회의 운동이슈나 조직 등에 거대한 변화가 나타났고, 그 변화에는 공적 윤리 관념의 변화 역시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이 변화를 가장 잘 암시하는 단어 중 하나가 ‘착한’이라는 관형사다. ‘착한’은 보통 인간의 심성을 수식할 때 쓰인다. ‘마음씨가 착하다’라고는 하지만 ‘그 돈이 착하다’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 90년대 말부터 변화가 감지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며 이 관형사의 수식범위가 무한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얼굴이 착하다’라는 표현이 TV예능 프로그램에서 등장했다. ‘착한 연예인’이라는 말은 연예인의 개인적 심성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적 사회참여 등을 칭찬할 때 쓰인다. ‘착한 기부’라는 말도 등장했고, ‘착한 소비’라는 말 역시 부각되었다.
(2017년도 진행된 '윤리적 소비' 공모전. 착한 소비의 다른 표현이 '윤리적 소비'다)
‘착한’은 단순히 ‘좋은’, ‘훌륭한’ 등의 윤리의식만을 반영한 단어는 아니었다. ‘착한 얼굴’, ‘착한 반찬’, ‘착한 상품’ 등은 그 대상이 그것을 대하는 나에게도 유익한가라는 물음을 수반했다. 유기농 식품은 나의 아이에게 유익한 착한 상품인 반면, 노키즈존은 타인의 아이들이 나에게 유익한 존재가 아님을 선언하는 공간이다. ‘착한’의 반대말은 때로 ‘나쁜’이 아니라 ‘민폐’가 되기도 한다. 유익함과 윤리의식의 이 오묘한 만남이 오늘날 ‘착한’이라는 관형사의 성격을 특징짓고 있다.
사회운동이 위축되는 과정에서 윤리의식이 공론화되는 방식 또한 변했다. 예컨대, 기업의 관행들을 보자. 최근 십수 년간 착한 기업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인 회사가 ‘유한킴벌리’다. 유한킴벌리의 유명한 광고 카피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로 마치 생태친화적인 가치지향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LG는 의인상을 만들며 이미지메이킹에 나섰고, 스타벅스는 장애인 고용으로, 오뚜기는 비정규직 제로를 대외적으로 추구하며 착한 기업 리스트에 올랐다. 기업들은 이제 상품 자체보다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의 윤리적 자기인식을 타기팅하기 시작했다. 2008년 촛불시위의 주역인 2030 청년들이 이 착한 소비의 핵심 주체들이다.
연예인을 비롯한 샐러브리티들이 여기서 다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착한’ 연예인으로 거론되는 이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보통 사회참여를 추구하는 지식인형 엔터테이너가 있는데, 김제동과 고 신해철 등이 많이 거론되었다. 생태지향적 욜로(YOLO)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이효리가 있으며, 각자도생의 정글에서 온정을 베푸는 기부천사 김장훈과 션이 다른 한 편에 있다. 때로는 보다 적극적인 투사형 엔터테이너 김여진, 정우성, 이승환 역시 존재한다.
가짜뉴스와 유해물질들의 위험에 둘러싸인 현대인들의 삶에서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모종의 새로운 좌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들의 특정 행위를 모사한다기보다 이들의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닮고 싶어한다. 잠시 ‘착한’이라는 단어와 연관 관계에 있는 단어들을 떠올려 보자. 이 단어의 출현을 1년 앞두고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말이 출현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개념 연예인’이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세 용어들은 모두 촛불시위에 나와 사회의 안녕과 정상화를 기원하는 존재들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이들의 반대말을 찾기 위해 이들의 반대편에 누가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 태극기 부대의 노년층 시위대를 일컫는 혐오발언이 ‘틀딱’이다. 틀니를 딱딱 거린다는 이 표현은 우리가 ‘착한’이라고 수식하는 규범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회피하며 만들어지고 있는지 알게 해준다. 고 신해철, 이효리, 정우성 등을 보며 시대의 좌표와 트렌드를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 공적 윤리와 시대의 위너(winner) 이미지는 모호하게 뒤섞여 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이끄는 샐러브리티의 라이프스타일과 시대로부터 뒤쳐진 우파 노년층의 라이프스타일만큼 현대 청년층의 가치지향을 가르는 명료한 구분선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김제동이 인권친화적인 발언을 하면서 고액을 받는다는 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인권친화적인 발언이 그를 고액 강연자로 만들어 주고 있다는 점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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